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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는가?
  관리자
 
     
  ③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는가? 
 예수님의 12제자 중 최대 7명까지는 부름받기 전의 직업을 추정할 수 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 중 네 명, 즉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였음이 확실하다(막 1:16∼20). 도마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호수로 같이 갔다는 점에서(요 21:2) 어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빌립도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요 1:43∼44)이라는 점과 벳새다가 ‘어부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갈릴리의 어촌이라는 점에서 어부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에 도마와 빌립이 어부였다면 예수님의 12제자 중 절반이 어부였던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고기를 낚던’ 어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꾸어 놓으셨다(마 4:19, 막 1:17). 

 한편 레위라고 불리기도 했던 마태는 세리였다(마 9:9, 10:3). 그는 세관에 앉아있을 때 주님께 부름을 받았다. 바로 앞서 언급한 어부들과 마태는 자신들이 처해 있던 삶의 현장에서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종(또는 전문 사역자)으로 부르셨는가?’ 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사회 생활을 중단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일의 순서가 바르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머지 다섯 제자들의 직업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알아낼 수 없다. 그런데 그 중 흥미로운 사람이 하나 있다. 그는 시몬인데 성경은 그를 가리켜 “가나나인”(마 10:4, 막 3:17)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단어는 흔히 생각하는 대로 ‘가나’나 ‘가나안’과 연관이 있지 않고, 아람어 ‘카난’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말을 누가는 ‘셀롯’이라는 헬라어로 번역해서 시몬에게 붙이고 있다(눅 6:15, 행 1:13). 마태, 마가가 사용한 ‘가나나’와 누가가 사용한 ‘셀롯’은 같은 의미로서 모두 ‘열심당원’을 말한다. 

 예수님 시대의 세속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열심당원’들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제국을 종교, 민족적 열심과 무력으로 물리치고 야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이런 점에서 ‘열심당원’들은 오늘날 이슬람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카에다’나 ‘탈레반’과 같은 과격한 민족, 종교 무장 세력을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로마 제국에게 ‘부역’했던 세리를 부르신 동시에, 로마 제국과 그들에게 협력한 마태와 같은 유대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혁명가를 제자로 삼으신 것이 된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는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품속에서는 좌우의 구분이 눈 녹듯이 녹아버린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머지 제자 중에 유다가 둘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를 누가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소개하고 있고(눅 6:16, 행 1:13),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부르고 있다(마 10:3). 이 유다는 성경에 활동상이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요 14:22 참조). 다른 유다는 4복음서 모두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마 10:4, 막 3:19, 눅 6:16, 요 6:71). 여기에서 “가룟”은 그의 출신지인 “케리요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는 “돈 궤를 맡은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요 13:29). 요즘의 ‘회계’인 셈이다. 그는 사단에게 사로잡혀 스승을 배반한 자로서(눅 22:3) 주님으로부터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들었다(막 14:21). 

 예수님의 12제자 중 나머지 두 명, 곧 바돌로매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이름 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 중 바돌로매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과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지만 근거가 강력하지 않은 실정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12제자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됐다. 이들 중 과반수가 어부였고, 나머지는 세리, 혁명가, 그리고 직업조차 밝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의 학식이나 심지어는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 일곱 지도자들의 선발 조건이었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행 6:3)에도 훨씬 미달하는 그야말로 “장삼이사”였다. 얼핏 보더라도 이미 닦여지고,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4복음서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듣고,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직접 목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고, 서로 다투는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일뿐이었다. 

 우리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셔서 구원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왜 이 세상의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을 놔두시고, 이들과 같이 닦여지지 않은 사람들을 택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주님의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식, 지혜,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써 감당해나가는 것임을 보여주시고자 이들처럼 문제 많고, 소외되고, 부족한 사람들을 고치시고, 싸매시고, 훈련시키셔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자신에게서는 자랑할 것이 없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우리 주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주시는 분이시다(고후 4:7). 그러므로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물론 우리들도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고 고백해야 한다. 

 직업과 자라온 배경, 심지어 정치적인 성향은 서로 달랐지만 예수님의 12제자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주저하지 않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제자의 길의 첫 번째 사항은 주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르는 것”이다(막 1:16, 18, 눅 5:11, 14:33). 신약성경에서 “따르다”(아코루떼오)는 동사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 중 으뜸이 되는 사항이다. 

 이런 점에서 이 12제자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찾아왔지만 주님께서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다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자(마 19:21, 막 10:21, 눅 18:22) 재물이 많아서 슬픈 기색을 하고 주님을 떠난 부자 청년과 완전하게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그가 “먼저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주저하자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눅 9:59∼60). 참 제자는 스승의 명령을 즉각 따르는 자이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예수 나를 오라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새찬송가 324장 1절).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