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홈페이지 영어 홈페이지
 
홈 > 자료실 > 칼럼자료
 
 
 
 
 
이름 없는 제자들 (상)
  관리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사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인류 위에 군림하였던 죄악과 저주와 죽음의 권세를 철폐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사역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각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셨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는 12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름 없는 제자들도 수없이 많았다. 12명의 ‘공식’ 제자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이들이 등장해서 그들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두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의 ‘비공식’ 제자들, 즉 이름 없는 제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결정적인 순간에 뿔뿔이 사라진 12제자들


 12제자들은 모두 주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아(막 3:13∼19)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지만(막 10:28)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막 1:22)과 놀라운 표적과 기사(마 11:4∼5)를 직접 보고 듣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모습을 보여준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그들을 책망하실 정도였다(막 8:17∼18).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예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악화된다는데 있다. 처음에는 그저 예수님을 잘 모르는 ‘무지’의 단계에 머물렀지만(막 1:1∼8:26), 예수님께서 장차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오해’의 단계로 악화되더니(막 8:27∼14:9), 급기야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는 ‘배반’의 단계로(막 14:10∼16장) 파국에 이르게 된다. 하나는 주님을 배반했고(막 14:10), 또 하나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며(막 14:66∼72), 나머지 열도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막 14:50). 제자들의 이 같은 부족한 모습이 특히 마가복음에 집중적으로 보도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마가복음의 반제자적 경향’이라고 부르는 성서학자들도 있다. 


 2. ‘이름 모를 제자들’의 등장


 12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향한 여정을 출발은 했으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뿔뿔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제자들이 없어진 것을 의미했다. 누가 고난의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자리까지 갈 것인가? 
 바로 이 때 이름 모를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부터 거의 끝날 때까지 주변에서만 맴돌며 숨어있던 인물들이 내러티브의 중심부로 숨 가쁘게 이동한다. 그리하여 외로우신 주님 곁을 지키고 12제자들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가히 ‘중심부’의 ‘해체’라 할 수 있는 일대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독자들(또는 청중들)은 누구를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제자의 길’의 본으로 삼을 것인가? 12명의 ‘공식 제자들’인가, 아니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까지 따라간 ‘비공식 제자들’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비공식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본 후로 잠시 미루기로 하자.


 3. 맹인 걸인 바디매오


 바디매오 이야기는 마가복음에서 매우 ‘전략적인 자리’에 위치한다(막 10:46∼52). 우선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예루살렘 인근인 여리고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베드로의 신앙고백(막 8:29) 직후, 예수님께서 곧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실 때마다(막 8:31, 9:31, 10:33∼34) 예수님의 ‘공식 제자들’은 인간의 사리사욕에 사로잡혀서 엉뚱한 반응을 보인(막 8:32, 9:32∼34, 10:35∼41) 다음에 바디매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바디매오의 열심이 부각되어 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위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결국 예수님께서 멈추시고 “그를 부르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막 10:50). 걸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뛰어 나가면서 내버린 그의 겉옷은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께 부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둔 행동에 버금가는 것이었다고 많은 신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본문에는 바디매오를 부른다는 표현이 세 번 나온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10:49). 복음서에서 “부르다”라는 표현이 주님께서 제자로 부르실 때 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신 것은 단순히 그의 요청을 들어주시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그의 소원을 말씀드렸다(10:51). 특히 여기에서 “본다”(‘아나블레포’)는 동사는 ‘다시 보다’, 또는 ‘위를 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육신의 시력을 되찾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영적인 눈까지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많은 주석가들은 지적한다. 그렇다면 바디매오가 구한 것은 바로 직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잘못 구한 것(막 10:37)을 바로 잡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시자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52)라고 기록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막 11:1), 즉 ‘십자가로 향한 길’이다. 그 길은 12제자들이 끝까지 가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했던 길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따른다. 여기에서 사용된 “따르다”(‘아코루떼오’)는 동사는 제자의 직무를 나타내는 전문용어이다. 

 이제 바디매오는 육의 눈과 영의 눈이 동시에 열려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 보다 정확히 골고다를 향한 ‘슬픔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실상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바디매오를 이름 없는 제자라고 하는 것은 ‘바디매오’가 그의 본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아람어에서 ‘바’로 시작되는 이름은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10:46). 본문 그 어디에도 그의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그의 이름은 마가복음 기자에게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공식적으로’ 제자가 되는 것보다 묵묵히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의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후세에게 생생히 전하는 익명의 제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지 모른다. 또한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마다 이름 모를 제자가 되어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기”를 마가가 원했을지 누가 알 것인가?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