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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들을 선택하신 예수님
  관리자
 
     
  ‘신약성경에 나타난 제자의 길’을 뒤따르고 있는 우리는 먼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친히 선택하신 열두 명의 제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예(주후 1세기)나 지금(21세기)이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동일하다. 


 1. 복음 중의 복음
 찬송가 518장(‘기쁜 소리 들리니’)의 2절 가사는 이렇게 끝난다.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구원하신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요, ‘모든 사람이 죄인’(롬 3:23)이니 온 인류가 죄 가운데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니 그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니겠는가? 

 월터 필그림(Walter Pilgrim)이란 누가복음 학자는 누가복음 15장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불렀다. 누가복음 15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고서 “이 사람은 왜 죄인들과 어울리나?”하고 수군거릴 때 예수께서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 찾기 비유’(눅 15:3∼7)이고, 두 번째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눅 15:8∼10)이며, 세 번째는 흔히 ‘탕자의 비유’로 (잘못) 알려져 있는 ‘잃은 아들을 찾는 비유’(눅 15:11∼32)이다. 

 이 세 비유는 모두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100마리 양 중 한 마리를 잃은 목자, 열 개의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은 여인, 그리고 두 아들 중 한 아들이 집을 나간 아버지가 각각 잃은 양, 드라크마, 아들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기쁘겠는가 하는 것이 요점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 비유의 결론으로 이처럼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눅 15:7, 10, 24, 32).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예수께서는 항상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한 명이라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도록 힘쓰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눅 5:32). 그러기에 누가복음 15장은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2.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서명하지 않은 고액의 수표와 같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죽도록 사랑한다고 해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그것을 제대로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리 무뚝뚝하고 둔감한 사람이라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요 1:1∼3)께서 자기를 비우사 창조주의 지위를 버리시고 피조물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도 모자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다(빌 2:6∼8, 요 1:14). 창조주가 피조물을 겸손과 온유로 섬기러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막 10:45, 마 11:29).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되었다(요 3:16).


 3.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심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특징 중 하나가 제자를 삼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침례를 받으시자마자(마 3:13∼17) 갈릴리 해변을 지나다니시면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첫 제자로 부르셨다(막 1:16∼20).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또한 빌립(요 1:43∼44)과 마태(마 9:9, 10:3)를 부르신 기록이 나온다. 열두 제자 중 나머지 여섯 명을 직접 부르신 기사는 신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에 한 스승이 여러 명의 제자들을 두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세계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주전 5세기에 이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신약성경 또한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막 2:18). 안드레와 요한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침례 요한의 제자였다(요 1:40). 사도 바울도 한 때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었다(행 22:3).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을 선택하셨을까? 마가복음 3장 14∼15절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도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나가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본받고(요 13:12∼17), 그의 “자취를 따르도록”(In His step)(벧전 2:21)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구원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신약성경의 원어로 볼 때 ‘제자’(마데테스)란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고, ‘사도’(아로스톨로스)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 배우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제자’이고, 또한 예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사도’이다. 그런데 주님께 뭔가를 배워야 보내심을 받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사도가 되기 전에 그들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면 왜 “열둘”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참 이스라엘”을 의미할 것이다(계 21:12 참조).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사도들은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맛디아를 뽑았다(행 1:15∼26). 성서학자들은 맛디아를 뽑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된 반면 이후에는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열둘”이란 숫자가 상징적으로 중요했다고 본다.


 4.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선정되었는가?
 예수님의 12제자 명단은 신약성경의 네 곳에 나온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 행 1:13). 이 중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네 명은 어부였다는 것이 확실하다(막 1:16∼20). 예수님께서 시몬에게는 베드로(‘반석’)란 이름을,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막 3:17)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이로 볼 때 야고보와 요한은 천둥처럼 성격이 급했던 것 같다(눅 9:51∼56 참조). 

 마태가 세리였다는 것도 확실하다(마 9:9, 10:3). 그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님께서 부르셨다. 그의 이름은 마가복음(2:14)과 누가복음(5:27)에서는 ‘레위’라고 기록되었다. 예수께서 직접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또 하나의 인물인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요 1:43∼44)이라는 점과 벳새다가 ‘어부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갈릴리의 어촌이라는 점에서 어부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여섯 명의 첫 제자들은 많은 점에서 서로 달랐지만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실 때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막 1:16, 18, 눅 5:11) 따랐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절대 순종’은 예수님의 같은 명령을 따르지 않은 부자청년(마 19:21, 막 10:21, 눅 18:22)이나 다른 사람들(눅 9:59∼60)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첫 제자들이나 21세기의 오늘날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주님의 이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